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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祠堂)이란 ?

松庵 | 2011.12.11 01:15 | 조회 9279

사당(祠堂):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 가묘(家廟)라고도 한다.

근원은《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것으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조준(趙浚) 등이 시행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당시는 불교(佛敎)가 성행하던 때 이어서 쉽게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사당(祠堂)의 시행이 철저히 강요되었다.

조선(朝鮮)초기에는 사당(祠堂)을 설치하지 않은 사대부(士大夫)는 문책(問責)을 당하기도 하고 또 이것이 시빗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宣祖) 이후부터는 사대부(士大夫) 양반(兩班)층에서 일반화(一般化)되었고 서인(庶人)들도 이를 따랐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대청(大廳) 모퉁이나 기타 적당한 곳에 부설(附設)하였다.

사당(祠堂)에는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신주(神主)를 모시는데 옛날에는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祠堂)을 세워야 했다.

위치는 정침(正寢) 동편에 3칸으로 세우는데 앞에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섬돌 둘을 만들어 동쪽을 조계(阼階), 서쪽을 서계(西階)라 하여 모두 3계단으로 하였다.

사당(祠堂) 안에는 4감(龕)을 설치하여 4대조(代祖)를 봉안(奉安)했는데 반드시 북단에 남향으로 하고 서편부터 제1감이 고조고비(高祖考妣), 제2감이 증조고비(曾祖考妣), 제3감이 조고비(祖考妣), 동편인 제4감이 고비(考妣)의 위(位)로 하였다.

감 밖에는 휘장(揮帳)을 드리우며 각 위패(位牌)마다 제사상(祭祀床)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 쌍씩을 놓았으며 최존위(最尊位) 앞에는 향상(香床)을 놓되 그 위에 향로(香爐)는 서쪽, 향합(香盒)은 동쪽에 놓았다.

사당(祠堂)은 담을 쌓아 가리고 앞에 대문을 만든다.

신주(神主)는 가문(家門)에 따라서 4대 봉사(奉祀), 3대 봉사, 2대 봉사를 하였다.

가묘(家廟)를 설치한 까닭은?

불교(佛敎)의 법도(法道)는 화장(火葬)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개국 초기에는 불교의 전통(傳統)에 따라 화장(火葬)하는 풍습(風習)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유교(儒敎)의 이념보다 불교(佛敎)의 이념이 좀 더 지배적(支配的)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지배세력(支配勢力)이 이를 막기 위해 내놓은 것이 가묘제도(家廟制度)이다.


 법제로서의 상, 제

세종(世宗) 24년(1442)에 외조모(外祖母)의 상(喪)에 상주(喪主)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승중장손(承重長孫)이고 외손(外孫)은 상주(喪主)노릇을 할 수 없다고 판시(判示)하였다.

한편 성종(成宗) 5년(1474)에는 부모(父母)의 화장(火葬)을 엄히 다스리도록 하고 위반(違反)자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는 물론 가까운 이웃까지도 논죄(論罪)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종(中宗) 11년(1516) 정광필(鄭光弼) 등은 서인(庶人)이나 천민(賤民)들도 모두 3년상(三年喪)을 거행(擧行)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를 행하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허락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례(事例)에서 볼 수 있듯이 적어도 성종조(成宗朝)까지는 백성(百姓)들 중에 부모(父母)의 장례(葬禮)를 불교(佛敎)의 전통의식(傳統儀式)에 따라 화장(火葬)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며 상주(喪主)가 될 수 있는 사람에서 외손(外孫)을 제외시키려고 법제(法制)화를 시도할 정도로 외손봉사(外孫奉祀) 또한 널리 행해졌던 것이다.

조선조(朝鮮朝)가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원년(1392)에 벌써 가묘(家廟)를 세워 선조(先祖)에 대한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고 그밖에 제사(祭祀)는 일절 금(禁)하게 하였다.

태조(太祖) 6년(1397)에는 기일(期日)을 정하여 기일까지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되 소위 구폐(舊弊)인 불교(佛敎)식 제사(祭祀)를 따르는 자는 헌사로 하여금 규리(糾理)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반포(頒布)된 해인데 여기에 보면 차자(次子)는 가묘(家廟) 즉(卽) 사당(祠堂)을 세울 수 없게 하였다.

즉 적장주의(嫡長主義)를 적극(積極) 권장(勸獎)한 것이다.


조선 초기의 상, 제

개국(開國)한지 40년이 경과(經過)한 세종(世宗) 14년(1432)의 기록(記錄)을 보면 불교식(佛敎式)으로 상을 치르는 자가 사대부(士大夫) 10명 중 6~7명에 달하고 유교식(儒敎式)으로 상(喪)을 치르는 자는 겨우 3∼4명에 불과한데 불교식(佛敎式)으로 치상(治喪)을 하는 자는 제(祭)를 올리고 불사(佛舍)를 찾는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16세기의 중종(中宗) 때까지도 사대부(士大夫)들이 상제(喪祭)를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거행하지 않아 곡용(哭踊)하는 수나 음식절차(飮食節次), 기공(期功)의 복제(服制)가 모두 실시되지 않는데도 대책(對策)을 강구(講究)하지 않는 실정(實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초기에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유교식(儒敎式) 상제(喪祭)가 강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르는 자가 비록 사대부계급이라 하더라도 10명 중 3∼4명에 불과한 실정이었으며 대다수는 3년상(三年喪)과 유교식(儒敎式) 상제(喪祭)를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식(佛敎式) 상제(喪祭)를 따르는 경우가 보편적(普遍的)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실제의 제사(祭祀)가 어떻게 거행(擧行)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가묘(家廟)의 설립(設立)이 어느 정도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왕조실록(王朝實錄)의 기록(紀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개국 첫 해부터 가묘제사(家廟祭祀)를 법제화(法制化)하고자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경과한 태조(太祖) 6년에도 “사대부(士大夫)의 가묘제도(家廟制度)가 이미 명령(命令)된바 뚜렷한 데도 전적으로 불교(佛敎)를 숭상(崇尙)하고 귀신(鬼神)에 아첨(阿諂)하여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祭祀)를 받들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한 태종(太宗) 원년(1401)에는 “가묘설치(家廟設置)의 명령이 내린지 이미 여러 해가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현혹되어 가묘를 세우지 않을 뿐 아니라 가묘제사(家廟祭祀)를 즐겨 행하는 자가 없고 이단의 사설(邪說) 즉 불교(佛敎)에 굳어져서 이를 깨뜨릴 방법(方法)이 없으며 가묘(家廟)를 설치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의 실제(實際)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세종(世宗) 13년에는 국법(國法)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위로는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祭祀)를 지낼 것을 규정(規程)하였으나 사람들이 불교(佛敎)를 신봉(信奉)한지 오래되어 유식자(有識者)도 제(祭)를 올리는 풍속(風俗)을 혁파(革罷)하지 못하였고 조상(祖上)의 기일(忌日)에도 승재(僧齋)라 부르는 재(齋)를 행(行)하고 승려(僧侶)에게 밥을 대접하는 것을 주요하게 여기며 가묘(家廟)의 제사(祭祀)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다음 해인 세종(世宗) 14년(1432)에도 대소 인이(人吏) 중에 가묘(家廟)를 세우지 않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초기(朝鮮初期)에는 국법(國法)에 따라 주자가례(朱子家禮)식의 가묘(家廟)를 세워 유교식(儒敎式)의 제사절차(祭祀節次)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祭祀)를 지내는 자가 100집에 한 두 집도 안 될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래(傳來)의 불교식(佛敎式) 제사(祭祀)인 재(齋)를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가묘(家廟)를 설치하고 유교식(儒敎式)으로 제사(祭祀)를 거행(擧行)하기 위해서는 제사(祭祀)의 주재자(主宰者)를 적장계열(嫡長系列)의 혈손(血孫)에 국한(局限)하여 제사(祭祀)가 상속(相續)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이 제사(祭祀)를 분할하여 윤회봉사(輪回奉祀)하고 아들이 없더라도 딸이 있으면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딸이나 외손(外孫)으로 하여금 자신(自身)의 제사(祭祀)를 담당하게 하는 조선 초기의 사회적(社會的) 현실 속에서 유교식(儒敎式) 가묘설립(家廟設立)과 가묘제사(家廟祭祀)는 시행될 수 없었다.

16세기인 중종조(中宗朝)와 명종조(明宗朝)에 들어와서도 아들이 없는 사대부(士大夫)가 가묘(家廟)를 설립하지 않고 딸로 하여금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또 중국(中國)과 달리 종법(宗法)이 없어 장남(長男)의 처(妻)라고 할지라도 남편(男便)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직접 자신이 제사(祭祀)를 주재(主宰)하였는데도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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